'존중'을 강요하는 대법관... 그 오만함에 모욕감 느낀다

'존중'을 강요하는 대법관... 그 오만함에 모욕감 느낀다

'존중'을 강요하는 대법관... 그 오만함에 모욕감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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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 기자] ▲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5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 남소연 선거가 끝났다. 숨쉬기가 편해졌다. 벌써 오래전 일 같지만, 선거라는 국민주권의 시간을 침해하려 했던 대법원의 사법 쿠데타 후에 국회에 출석한 법원행정기업은행 전세자금대출
처장(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 "사건 결론 여하를 떠나 최고 법원의 판결과 법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필요하다." 이 발언을 들으며 묻게 된 질문. 권위는 스스로 내세우는 자질인가? 아니면 남들이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는 것인가? "존중"은 남에게 요구할 수 있는 건가? 이 발언에는 법원과 법관은 무조건 시민의 존중을주택담보대출 구비서류
받을 만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태도가 깔려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만한 태도다(이 나라 사법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번 칼럼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제'... 나는 차라리 AI 판사를 믿겠다>에서 지적한 바 있다). 존중은 그럴 만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남들이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는 것이다. 남에게 강요해 받는 게 아24시간신용대출
니다. 존중받기는커녕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비난 받을 행위를 해놓고 존중을 요구, 강요하는 것은 상당수 법관이 자신들은 구름 위에 있는 존재인 걸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징표다. 그들은 이 나라를 시민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사법 귀족의 나라라고 여기나 싶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영화 <승부전세자금기금대출
>가 파고든 것 ▲  영화 <승부>의 한 장면. 하나님은실수
ⓒ 영화사 월광 이렇게 오염된 권위와 존중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리는 말이 스승이다. 내가 대학 선생이기에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5월에는 스승의 날이 있다. 그때가 되면 나를 찾아오거나 연락하는 학생, 졸업생도 있지만, 그런가 보현재은행금리
다 하고 대충 넘어간다. 별 의미 없는 날이 되었다. 스승이라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은 학교여야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스승의 뜻은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온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어느 학교든 관계없이 지금 한국의 학교는 학생을 "가르쳐서 인도"하는 곳이 아니다. 학교는 진즉에 붕괴연말정산식대
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아니라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한 입시 준비기관이 되었다. 입시 준비는 교육이 아니다. 대학은 취업 준비기관이 되었다. 한탄하는 게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 이 글에서 한국 교육의 참담한 현실을 논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관계가 무엇인지는겸손하게
생각해 볼만하다. 넷플릭스에서 뒤늦게 바둑영화 <승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스승은 누구이고 권위는 무엇인가?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혹은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이다. 그렇다면 그런 힘이나 위신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학교의 선생, 법관, 혹기아자동차 광고
은 이 사회의 엘리트라고 불리는 이들이 목에 힘을 주고 남들에게 자신을 "존중"하라고 요구하면 되는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승부>는 알려준다. 나는 바둑에 문외한이지만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인 조훈현 국수(이병헌)와 이창호 국수(유아인, 아래 호칭 생략)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이 벌였던 치열한 바둑 전투도 기억한다. 이창파산면책자카드발급
호가 조훈현의 제자였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사제 관계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몰랐다. <승부>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좋은 문학이나 영화의 고갱이는 인간관계의 깊은 탐색이다. 영화평론가는 아니지만 영화 애호가로서 나는 <승부>를 올해 들어 지금까지 본 가장 인상적인 한국영화로 꼽는다. 어디서나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모든 일은 결국 삶의 문제가 된다. 그것이 운동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혹은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 경기나 <승부>처럼 바둑의 세계를 다루든 마찬가지다. 바둑을 즐기는 관객이 볼 때는 이 영화에서 펼쳐지는 두 바둑 기사의 치열한 수싸움과 전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나처럼 바둑을 모르더라도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승부>에서 어떤 부분이 사실이고 허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영화가 되면 그것은 한 영화 작품으로 평가하면 된다. <승부>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 신동으로 불리던 이창호의 재능을 알아본 조훈현이 이창호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 수제자로 키우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이런 모습은 마치 무협 영화의 공식을 연상시킨다. 제도 학교가 아니라 재능을 가진 제자를 발굴해서 개인 교습, 영어로 말하면 튜터링(tutoring)을 통해 가르치는 모습이 그렇다. 원래 그것이 배움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부터 둘의 관계는 만만치 않은 국면에 접어든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스승 조훈현은 매서운 공격을 중시하는 전투적 바둑을 구사한다. 싸움꾼이다. 상대방이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파고들어 무섭게 공격하는 기풍을 구사한다. 제자는 다르다. 이창호는 처음에는 충실히 조훈현의 바둑을 따르려고 한다. 하지만 스승의 방식을 따르고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스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찾기 시작한다. 조훈현의 공격적인 기풍과 다르게 이창호는 나중에 그의 별명이 된 '돌부처'처럼 묵묵히 지키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는 방식을 고수한다. 그 결과 영화에도 나오지만 1990년 제29기 최고위전 결승에서 조훈현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고 이창호 시대를 연다. 이창호는 불과 15세 때 스승의 타이틀을 빼앗았고 몇 년 뒤에는 스승에게서 모든 타이틀을 가져온다. <승부>가 여기서 끝났다면, 영화는 스승을 앞서 나아가는 '청출어람'의 뻔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그렇게 무너진 스승이 자신을 앞서가는 제자를 바라보면서 그 제자에게서 뭔가를 배우려는 데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구절이 떠올랐다.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교사와 교사의 학생들이라는 구분은 사라지고,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교사-학생과 학생-교사. 교사는 더 이상 단순히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학생과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자가 된다. 학생도 배우면서 동시에 가르치는 자가 된다. 교사와 학생은 모두 성장하는 과정에 공동으로 책임을 지게 된다."(파울로 프레이리, <피억압자의 교육학>) 조훈현과 이창호의 관계는 이 말에 꼭 들어맞는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오듯이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한국 최초로 우승하며 영웅이 된 조훈현은 제자에게 패배한 뒤 충격에 빠지고 좌절을 겪는다. 실패를 몰랐기에 더 쓰라린 패배다. 그러나 조훈현은 그 패배를 통해 자신이 최고라고 믿어왔던 바둑 세계를 돌아보게 되고 이창호 바둑이 지닌 힘을 따져보게 된다. 자신과 다른 제자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창호의 바둑 전관왕 독식을 막는다. 자연스러운 '권위와 존중'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  영화 <승부>의 한 장면. ⓒ 영화사 월광 그 뒤로도 스승과 제자는 수백 번의 바둑 승부를 펼친다. <승부>는 기본적으로 조훈현의 시각에서 둘의 관계를 다루면서 제자를 대하는 그의 착잡한 심경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다. 이창호는 거의 말이 없지만, 스승을 이기고 나서 자신만의 바둑 기풍을 찾았다고 독백처럼 말한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듯이 이창호는 스승을 꺾은 뒤 일인자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스승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제자에게 도전한다. 필요하다면 예선전을 거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승도 제자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한다. 자신과 다른, 혹은 자신을 앞서간 제자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게 참 스승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모든 성숙한 인간관계에 적용된다. 앞서 적었듯이, 문학예술처럼 바둑에서도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그때 바둑은 단지 경기가 아니라 삶의 축도가 된다. <승부>에서 조훈현은 패배 후 긴 정신적인 방황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일본인 스승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스승이 했던 말, 자신이 오랫동안 연습해 온 바둑판에 새겨놓은 글귀를 떠올린다. 세고에는 조훈현에게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삶은 때로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지만 훨씬 자주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직시할 슬픈 진실은 인간은 오직 그런 좌절과 고통을 통해서만 뭔가를 배운다는 것이다. 좌절이 없으면 성숙함도 없다. 정신분석학에 기대면, 부족함이 없으면 인간은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살면서 한 번도 좌절을 겪지 않고 승승장구하면서 엘리트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그걸 모른다. 높은 의자에 앉아서 졸속 파기환송으로 국민주권의 시간을 침해했던 법관들, 혹은 국민을 저 아래의 천한 존재로 여기는 정치꾼들의 오만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모욕감을 느낀 이유다. 스승이라는 말이 의미를 지니려면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믿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권위와 존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먼저 깨닫는 게 필요하다. 학교 안팎으로 우리 시대는 참 스승이 너무나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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